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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의 역사향토인물
향토인물

고려 인물

  • 이 집(李 集 1327-1387)

    고려 말의 학자이며, 초명은 원령(元齡)이요 호는 둔촌(遁村) 또는 호연(浩然)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과 절개로 알려졌다. 일찍이 신돈에게 반항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아버지를 업고 영천(永川)의 친구 최원도의 집에 숨어 살았다. 1371년 신돈이 죽자 봉순대부 판전교시사를 역임하다가 벼슬에 뜻이 없어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묘소는 하대원동에 있으며 저서로는 『둔촌유고집』(광주이씨종중 소장)이 있다.

  • 조 견(趙견 1351-1425)

    고려조 수절의신(守節義臣)의 한 사람이다. 초명은 윤(胤)이요 시호는 평간(平簡)이요 관향은 평양이다. 일찍이 불교에 입문하여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30이 넘어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형 조 준(趙浚)이 이성계를 도와 모계하는 것을 만류하였으며, 고려조가 망하자 청계산에 은둔하였다. 이태조가 평성부원군 개국공신으로 대우하여 여러 번 부르고 또한 직접 찾아가도 나가지 않고 양주의 송산(松山)으로 옮겨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묘소는 여수동(현재 하대원동)에 있으며 양주 사천우(沙川宇)에 남을진(南乙珍)과 함께 배향되었다.

  • 이지직(李之直 1354-1419)

    고려 말의 문신이며 청백리이다. 초명은 도(途)요, 자는 백평(伯平)이요, 호는 탄천(炭川)이요, 관향은 광주이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한림교리 관찰사를 거쳐 보문각직제학 재임 중에 소도(昭悼)의 변란(1400년)이 일어나자 자기의 바른 주장으로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으나 이방원(태종)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여 광주 탄천(성남시)에 은일자적하였다. 세종 즉위 초에 형조 우참의로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후에 청백리로 선정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하대원동 산 3-1에 있고 저서는 『탄천선생유고』(국립중앙도서관소장)가 있다.

  • 이 원( 李 原 1368-1429)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자는 차산(次山)이요 호는 용헌(容軒)이요 시호는 양헌(襄憲)이요 관향은 고성이다.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조에서 사복시승 공조좌랑 예조좌랑 병조정랑을 역임하였고 조선조에서 좌부승지 좌명공신이 되고 철성군에 봉해졌다. 그 후 대사헌 관찰사를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 온 후 평양부윤 중군총제 참지의정부사 대사헌 판한성부사 추증익대좌명공신이 되고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의정부참찬 찬성사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여산에 유배되어 병사하였다. 안동 명호서원(明湖書院)에 배향되고 묘소는 도촌동(돌마면 가차곡 율리)에 있었으나 1990년 광주시 목리로 이장하였다. 저서로는 『철성연방집』권2에 수록된『용헌집』(고성이씨종중 소장)이 있다.

  • 김자수(金自粹 1351-1413)

    고려 말의 문신이며 자는 순중(純中)이요 호는 상촌(桑村)이요 관향은 경주이다. 1374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덕령부주부였으나 왕명거역으로 돌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교부령 파사재시사 대사성 세자좌보덕 판전교시사 좌상시 형조판서를 역임하다가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조 태종조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절의충신이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묘소는 분당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