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 각 분야에서 그 업적을 이룬 인물은 허다하게 많다. 그런데 나라의 운명이 다하는 격동의 시대에는 극심한 사상적 갈등을 겪거나, 심지어는 변절해야 하는 운명적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러한 시대는 특히 지식인으로서는 더욱 높은 윤리적 평가가 후대에 내려지게 되므로 더욱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으며, 곧은 절개를 지켜 나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권력의 속성상 새로운 권력에 따라붙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지라 할 수 있다. # 항상 곧고 효행이 뛰어난 신의지키는 대쪽 선비 | |  | | | | 고려 왕조 500년의 역사가 기울어 갈 즈음, 자신을 이겨내고 곧은 지조와 절개를 지켜 낸 것은 다른 어떤 업적보다도 추앙받을 만하며, 어떤 종교적 수양에도 뒤지지 않을 인격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대표인물이 둔촌 이집(遁村 李集)선생이다.
둔촌은 고려시대의 문인으로 1327년(고려 충숙왕 14) 6월 2일 이당의 둘째 아들로 출생, 1387년 6월 6일 세상을 떠나니 정몽주와 이숭인 등 유명한 학자들이 애도의 시를 지어 조상했다. 둔촌 선생의 본관은 광주(廣州), 어릴 때의 이름은 원령(元齡)이고, 자는 성로(成老), 호는 묵암자(墨岩子)였고, 은둔생활을 끝낸 후에는 자를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이름을 집(集)으로 고쳤다. 이제현(李齊賢), 안보(安輔)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당시의 명현 석학들과 교유했으며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작품에 시집 <둔촌 잡영(遁村雜詠)>이 있다.
둔촌의 묘는 성남시 하대원동 산 7-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남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1993년 8월 2일)됐다가, 성남문화원의 청원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219호로 승격 지정(2008년 5월 26일)됐다. 둔촌의 뜻은 항상 곧고 지절이 있었으며, 효행이 뛰어났고 대인 관계에서는 신의를 지키는 대쪽 같은 선비였다.
효는 모든 덕행의 근본이며 또한 교화의 근원이고, <효경>에 “무릇 효가 덕의 근본이다.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또한 “사람의 신체는 머리털에서 살갗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라.”고 했다. 둔촌은 바로 효를 실천해 귀감이 된 인물이다. 총각 시절에 그의 아버지가 종기를 앓아 고생을 했는데, 둔촌의 지극한 간호와 효성으로 병을 치료한 남한산성 ‘국청사 우물’ 이야기는 바로 둔촌 선생의 효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효심이 돈독했던 둔촌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올바른 정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말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세상을 주름잡던 요승 신돈의 악행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바른 정치를 촉구하는 한편, 바른 정치를 주문했다가 목숨까지 위태로와 지게 됐다. 이에 둔촌동 일자산 ‘둔굴’에 일시 피난했다가 얼마 후 늙은 부친을 업고 경북 영천으로 피신해 3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둔촌 선생의 뜻은 항상 곧고 지절이 있었으며, 국운이 기울어 가는 난세에서 한 때는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한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선비였다. # 600여 년을 내려오는 둔촌과 천곡 두 집안의 우정 이 사건을 통해 둔촌 선생은 대인관계에서도 남다른 신뢰를 쌓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친구인 천곡 최원도(泉谷 崔元道)와의 우정에 얽힌 이야기다. 둔촌은 천곡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그의 집에서 3년간의 피신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천곡의 부인과 여종 연아(燕娥) 등 가족들의 희생적인 보호를 받았다. 여종 연아는 천곡이 둔촌을 숨겨준 것을 알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1369년 둔촌의 부친이 별세했을 때는 아무 준비도 못한 둔촌에게 천곡은 자신의 수의를 내어주고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비밀리에 장사를 치러주었으니, 이곳이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있는 광주 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소다. 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 10일이 되면 도유리 나현 마을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를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충비 연아(제비)의 묘에도 양가가 모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러한 희생적인 우의는 실로 목숨을 걸고서야 가능한 것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두 가문의 우호를 유지하게 해주는 정신적 교훈이 됐다.
둔촌 선생은 공민왕 20년, 신돈이 역모로 주살된 후 개성의 용수산 밑 현화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판전교시사에 임명됐으나 곧 사직하고 현재 성남의 금토동과 천녕현(현재 경기도 여주)으로 낙향해 독서와 농경으로 세월을 보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둔촌이 조선의 벼슬을 한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는데, 둔촌은 조선이 건국(1392)하기 전인 1387년에 별세했다. 둔촌의 사적은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여러 글에 갖추어 실려 있었지만 임사홍 부자가 이극감 형제를 미워한 나머지 둔촌이 조선에 들어와 벼슬한 것처럼 모함해 그만 조선의 인물로 잘못 기록하게 됐고, 계속해서 시림(詩林)의 다른 이들도 이 잘못을 그대로 따랐다. 선조 임금 때 홍적이 고칠 것을 아뢰어서 왕도 인쇄할 때를 기다려 하라고 했더니, 1611년(광해군3) 비로소 둔촌의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에 의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수정됐다.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여러 사람들이 그 유덕을 추모해 광주 암사(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 강상(江上)에 서원을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모셨고, 숙종 때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이라는 현판이 내려졌다. 문장에 능했던 둔촌은 이색·정몽주·이숭인 등 당대의 저명한 석학들과 교유했으며, 그들에게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그의 지조가 굳었으므로 조야의 신망은 매우 두터웠다. 최자(崔滋), 류광익(柳光翼), 남용익(南龍翼) 등이 둔촌 선생을 고려조를 대표할 만한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했고, 둔촌의 시를 안적(安寂)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조의 문인들 가운데 이집의 문학적 성가(聲價)와 문학작품이 지니는 내용의 우수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1410년(태종 10) 7월에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이 <둔촌잡영> 머리말을 쓰면서 회상한 글을 보면, “선생의 용모는 장중하고 강의(剛毅)해 보였으며, 기품은 꽉 짜이면서 준수했고, 음성은 옥이 구르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해 나는 내심 몹시 기이하게 느꼈었다. 두 번째는 목은 선생의 초창(草廠:초막)에서 뵈었는데, 목은 선생께서는 경의를 갖고 대하면서 다음 날까지 함께 지내시기에 나는 곁에서 그 여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에 곧 도은께서 목은, 포은, 둔촌을 초대해 간략한 술자리를 마련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분매(盆梅)를 앞에 놓고 매화를 주제로 연구(聯句:한 사람이 한 구씩 불러 한 수를 이룬 시)를 지었는데, 나도 말석에 참여하여 그 분들의 경구(驚句)를 들었다.…… 하루 종일 그 시를 읽어보았는데 앞서 말한 그대로 꽉 짜이면서 준수하고 옥을 굴리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스러움이 모두 그 성률 속에 나타나 있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시란 거짓으로 지을 수는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빈 말이겠는가?“라고 했다. # 둔촌 못지 않은 아들 3형제로 최고 가문 일궈 둔촌은 정화택주(貞和宅主) 영주 황씨와 결혼해 장남 지직(之直), 차남 지강(之剛), 삼남 지유(之柔)를 낳았으니, 지직은 형조참의를 지냈으면서 청백리에 뽑힌 인물이다. 지강은 우참찬, 지유는 목사를 지냄으로써 광주 이씨는 둔촌의 절조 위에 더해 아들 3형제의 사환(仕宦)과 청백(淸白)이 더해지면서 점차로 사회적 리더를 배출하는 가문으로 성장해 갔다. 성현(成俔)은 그의 문집 <용재총화>에서 자신의 성씨(成氏) 문중을 자랑하면서도 광주 이씨가 으뜸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이처럼 광주 이씨가 큰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둔촌 선생의 가르침 때문이다. 둔촌은 후손들에게 ‘금을 광주리로 물려주는 것보다 경서를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남겼고, 둔촌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나라의 기틀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해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일컬어졌다.
둔촌은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숭고한 선비정신을 통해 높은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는 우리 고장 성남 시민으로서 자랑할 어른이다. 둔촌은 역사적으로 생애의 당대와 직후에 둔촌이 교유했던 벗들과 후학들에게 훌륭한 선비로 존경받던 것에 비해 오늘날에 와서는 충분한 조명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성남문화원에서 둔촌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을 추진해 오면서 둔촌의 묘역에 대해 성남시 향토유적 제2호 지정 추진과 경기도기념물 제219호로의 승격 추진 성과, 광주 이씨 묘역의 성남시향토유적 제7호 지정 청원 활동, 둔촌문학상의 제정과 백일장 개최, 둔촌연구회의 설치, 시조 백일장, 한시 백일장, 중국 심양시와의 둔촌 문화교류 사업 등 점차로 연구와 기념사업이 활성화 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둔촌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특별히 둔촌의 고향이 성남시였다는 점과, 평생 동안 일관했던 곧은 사상이 귀감으로 높이 추앙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3편에서는 ‘충신과 청백리의 고장, 성남’에 대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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